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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에 투항한 강홍립장군은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인가, 아니면 광해군의 밀명을 수행한 전략가였는지는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지만 대체로 매국노는 아니었다는 견해가 많다.

 

청나라와 명나라 그리고 조선

조선은 임진왜란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전쟁의 후유증이 채 가시기도 전에 북방에서 청나라의 침략을 받아 인조가 청태종에게 항복하는 상황이 되었다.

 

청나라가 명나라를 멸망시키는 임진왜란이 큰 역활을 했다. 명나라는 만주에서 누루하치가 여진족을 통일시키고 세력이 커지자 그를 견제하려고 했지만 조선에서 전쟁이 발발하면서 무산되었다.

 

임진왜란은 왜군이 명나라를 정벌하러 가기위해서 조선에게 길을 내어 달라는 명분이었기에 명나라 입장에서는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명나라를 대군을 조선에 파병했고 이로 인해서  누루하치를 견제할 힘이 없었다. 또한 국방비로 천문학적인 금액을 쓰면서 국력 또한 더 악화되었다.

 

임진왜란은 청나라에게는 커다란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누루하치의 청나라는 명나라에게 아주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고 조선에게도 부담이 되는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떠오르는 청나라와 망해가는 명나라 사이에 존재한 조선은 위태 로웠다. 당시 임금은 광해군인데 임진왜란을 직접 경험하고 전쟁의 참상을 누구보다 잘 알 고 있는 왕이었다.

 

청나라는 조선과 대립하고 싶지 않았고 명나라는 조선의 도움을 거꾸로 받고 싶어 했다. 양국사이에서 중립적인 외교를 펼치면 불안정한 상황을 이어가는 조선에 명나라는 거부하기 힘든 요구를 한다.  

 

강홍립의 출병, 사르후 전투 그리고 항복

청나라 세력이 너무 강대해지자 명나라를 청나라를 정벌하기로 결정하고 조선에게 군대 파병을 요청한다. 이때 조선의 왕 광해군은 파병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신하들은 이러한 광해군을 압박했다. 이른바 "재조지은"이라는 명분을 앞세웠기 때문에 광해군은 파병을 결정한다. 명나라는 이미 기울고 있었고 청나라와 전쟁을 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명나라의 끈질긴 요구 또한 거절하기 힘들었다.

 

당시 광해군은 선조의 적장자가 아닌 서자로 왕이 되었고 조정에서는 이러한 광해군을 반대하는 세력이 존재하고 있어 정치적 입지가 불안정한 상태였다.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상황을 회복하고 백성들을 돌보기 위해 여러가지 개혁적인 정치(대동법실시)를 이어 가고 있었지만 파병은 피 할 수 없었다.  

 

야사에 의하면 출병하는 강홍립에게 광해군이 은밀하게 명을 내렸다고 한다. 싸우는 척만 하고 상황이 불리하면 청나라에 투항을 하라고 했다.

 

강홍립은 장군이 아닌 문신이었다. 이러한 강홍립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한 것은 중국어에 능통했기 때문이다.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외교적인 상황이 발생할  때 대처하기 위함이다.

 

강홍립이 참여한 사르후 전투는 명나라 조선 연합군과 후금 누르하치와 전투였다. 병력의 차이는 거의 5배 가까이 조명 연합군이 많았지만 결과적으로 대패를 했다.

 

당시 명나라 사상자는 무려 4만명이 넘었지만 후금의 겨우 200명 정도이다. 강홍립의 조선군도 1만 명 이상사망하고 4천 명이 포로로 잡혀갔다. 

 

명나라는 조선이 가지고 있던 조총부대가 절실했기 때문에 강홍립을 필요로 했고 몇 번의 전투에서 큰 성과를 보이기도 했지만 결국 명나라 군대는 대패하고 강홍립은 청나라에 항복했다.

 

투항 이후 강홍립

강홍립은 8년간 청나라에 억류되어 있었다. 이때 청나라 정세를 파악해서 광해군에게 밀계를 했다고 한다. 이러한 강홍립의 활약은 조선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이후 병자호란이 발생하고 청태종이 조선에 올 때 강홍립도 같이 왔다. 조선에서는 그를 매국노, 역적이라고 멸시를 했고 조선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화병으로 죽었다.

 

당시 조선 조정은 강홍립을 신임했던 광해군이 반정에 의해 폐위되었고 인조가 왕인 상태였기 때문에 강홍립에게 우호적이지 않았고 병자호란의 책임 중 일부를 강홍립에게 전가했다.

 

강홍립은 양국이 화친하는 것이 백성들의 피해를 줄이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이에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조정신료들은 이 같은 행위 자체를 매국으로 매도했다.

 

반대의 견해도 있다. 거짓 항복이 아니었고 진실로 투항한 것이고 투항직후 조선군의 참수를 방관하고  항왜를 누루하치에게 밀고해서 몰살시켰다는 것이다.

 

후금은 강홍립을 후하게 대접했다고 한다. 포로 생활을 끝내고 조선에 돌아 갈때 후금은 중인인 2백5십 명과 조선인 31명 그리고 낙타 한 마리 수래 다섯 채 말 30 필을 주었다고 한다.

 

후금에서 포로 생활을 하면서 후금이 조선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을 막았고, 당시 후금의 정황을 조선에 알려 미리 대비하게 한 공이 있다.

 

강홍립이 항복한 이후 명나라는 조선에서 의도적으로 강홍립을 항복시킨 것으로 의심해서 남아 있는 가족의 처벌을 요구하기도 했다.

 

강홍립의 운명은 광해군과 함께 했다고 할 수 있다. 자신에게 밀명을 내린 광해군이 폐위되고 나서 조정의 분위기는 바뀌고 가족의 안전도 불안한 상태였다.

 

정묘호란때 청나라는 강홍립을 대동하고 조선을 침략했고 전세가 불리한 조선은 강홍립에게 강화를 주선했고 강홍립은 위기에 빠진 조선을 구하는데  결정적인 역학을 했다.    

 

역사는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서 다르게 보이기도 하지만 강홍립은 당시 격변하는 동아시아 정세의 한 폭 판에 서 있었던 불우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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