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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 전투, 청산리대첩_홍범도, 김좌진

일제에 항거하는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2개의 전투가 있다. 하나는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대한독립군의 봉오동 전투와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의 청산리 대첩이다.

우리나라 무장독립운동사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이다. 봉오동 전투는 일본 정규군과 전투에서 처음으로 승리한 전투이고 청산리 대첩은 최대 규모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이다.

 

봉오동 전투

봉오동 전투하면 홍범도 장군을 청산리 대첩하면 김좌진 장군을 연상한다. 사실 두 사람이 이끄는 부대가 각각의 전투를 수행해서 승리한 것은 아니다.

 

봉오동 전투는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대한독립군과 최진동 장군의 대한북로독군부 두부대가 연합으로 해서 1920년 6월 7일 봉오동에서 일본군을 기습 공격하여 대승을 이끈 전투이다.

 

봉오동 전투 이전에 항일 운동은 소규모 의병 수준이었고 전투력이 있다고 보기 어려웠으나 봉오동 전투는 무장한 독립군이 대규모 일본군과 전투에서 첫 승리를 한 것이다.

 

1919년 3.1 만세운동 이후 많은 독립투사들이 무장항쟁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만주에서 여러 단체가 결성되었고 그중에 2개의 무장단체를 중심으로 치러진 전투이다.

 

청산리 대첩

청산리 대첩은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이 이끄는 연합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10여 차례 전투를 벌여서 대승을 거두었다.

 

청산리 대첩은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만 전투를 한 것이 아니고 홍범도 부대도 전투를 했고 여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청산리 대첩은 봉오동 전투가 있은지 몇 개월 후인 1920년 10월 21일부터 5일간 청산리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로 일본군이 천명 이상 전사한 대규모 승리였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 이후 일본군의 대대적인 독립군 토벌이 있었는데 이를 피해서 홍범도와 김좌진은 러시아 땅 연해주로 모여들었다.

 

이들이 모인 곳인 연해주 "자유시" 당시 이들이 연해주로 모여든 것은 당시 러시아 혁명군(볼셰비키)은 일본과 적대적인 관계였고 한국의 독립군을 지원했다.

 

이곳에서 홍범도 장군과 김좌진 장군의 운명이 바뀌게 된다. 홍범도 장군은 평안도의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서 의병활동을 하였고 김좌진 장군은 충청도 부농의 아들로 태어나서 애국계몽운동을 하였다.

홍범도와 김좌진 장군이 청산리에서 만날 때 홍범도 장군은 이미 50세가 넘었고 김좌진 장군의 32세 젊은 청년이었다. 연해주 자유시에서 이들은 의기투합했으나 이후 서로 가는 길이 달랐다.

 

처음 러시아 혁명군은 독립군에게 호의적이 었으나 나중에 일본과 협상을 통해서 독립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유명한 자유시 사건이다.

 

자유시 사건은 우리나라 독립군을 두 갈래로 나누는 계기가 되었다. 홍범도 장군은 공산주의도 반공도 아닌 중립을 김좌진 장군은 반공으로 돌아 섰다.

 

홍범도 장군은 러시아에서 그리고 김좌진 장군은 다시 만주로 나왔다. 홍범도 장군은 레닌 당원으로 레닌을 만나 지원을 요청했다.

 

코트를 입고 권총을 차고 있는 홍범도 장군의 사진은 이때 찍은 사진이다. 여운형, 김규식과 함께 극동인민대표회의 대표 자격으로 레닌을 만난 것이다.

 

이후 홍범도 장군은 레닌의 강제 이주 정책으로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했고 거기서 재혼도 하고 집단농장 관리인으로 마지막에는 극장 경비원으로 여생을 보냈다.

 

이러한 홍범도 장군의 행적은 통일 이후 반공 이데올로기가 팽팽한 시대에서는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혀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의 영웅은 카자흐스탄 극장 경비원으로 생을 마감하고 광복된 조국에는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김좌진 장군은 홍범도 장군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자유시 사건 이후 공산당은 믿을 수 없는 상대라고 생각해서 북만주로 돌아와서 계속해서 독립운동을 했다.

 

1925년에 신민 부도 조직하고 왕성하게 활동을 했지만 공산주의자들은 이러한 김좌진 장군이 자신들과 노선을 달리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1930년에 암살을 한다.

 

조국을 독립시키는 독립운동에 대한 생각은 같지만 방법에 대해서는 서로 너무 달랐다. 같은 독립운동가이지만 이념에 따라 적군처럼 대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념에 대한 대립은 광복과 6.25를 거치면서 더욱 확고해졌고 아직까지 남과 북은 분단된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이다. 카자흐스탄의 홍범도 장군을 우리가 모셔오고 싶어도 북한이 반대를 하고 있는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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